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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잼 ★/영화, 드라마

김영삼의 하나회 숙청, 척결, 해체 과정 총정리! (feat. 서울의 봄)

by 꿀돈잼 2023. 11. 29.

 

영화 <서울의 봄>이 인기입니다. 영화를 보면 전두광(환)에게는 '하나회'라는 사조직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12.12 군사반란의 핵심 세력이었던 하나회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합니다. 군 내부에 어떻게 이런 사조직이 있었는지, 전두환과 노태우는 이 하나회를 어떻게 활용해 정권을 잡았는지, 그리고 하나회는 어떤 과정을 거쳐 숙청되고 해체되었는지 하나씩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회의 전신 오성회와 칠성회

1951년 최초의 정규 4년제 과정이었던 육사 11기에는 200여명의 생도들이 입교했고, 자연스럽게 그들은 지역 출신별로 어울립니다. 그 중 공부는 못했지만 운동은 좀 했던 전두환은 영남 출신의 노태우, 김복동 등의 생도들과 하나회의 전신인 오성회라는 친목 단체를 결성합니다. 

육사시절 전두환(뒷줄 왼쪽 네번째)과 노태우(뒷줄 오른쪽 첫번째)

 

그들의 유대관계는 육사를 졸업한 뒤 각자 군생활을 할 때까지 이어지고 오성회는 멤버가 늘어나 칠성회로 바뀌게 됩니다. 그렇게 군생활을 이어오던 그들은 정규 육사 4년제 과정 출신이라는 점에서 늘 엘리트 의식을 갖고 있었고, 그래서 선배들이 자신들에 비해 짧은 기간의 교육만 받고도 군의 요직들을 차지하고 있는 데 대해 불만을 가졌습니다.

 

  육사 11기의 성장

전두환과 육사 11기는 1961년 일어난 5.16 군사정변 이후 군에서 성장하게 됩니다. 5.16 당시 ROTC 교관으로 근무하던 전두환은 5월 16일 아침, 군사정변 소식을 들은 뒤 늦게라도 5.16에 합류하기 위해 육사 생도와 졸업생 약 1000여명을 동원해 5.16을 지지하는 시가행진을 벌입니다. 이를 알게된 박정희는 전두환을 인정하게 되고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 민원비서관, 중앙정보부 인사과장 등의 좋은 보직에 전두환을 앉힙니다. 

박정희(좌)와 젊은시절 전두환(우)

 

박정희는 1963년 제3공화국을 출범시킵니다. 이무렵 전두환은 박정희에게 군에서 박정희를 지지하는 육사 출신 사모임의 필요성을 건의하면서 자신들의 모임을 소개합니다. 박정희는 5.16을 함께하며 커져버린 육사 8기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육사 11기의 세력을 비호해주게 됩니다. 박정희는 그들에게 보직과 진급에서의 혜택을 주었고, 자신의 측근인 박종규와 윤필용에게도 육사11기를 지원하도록 지시합니다. 

 

 

  하나회의 결성

이후 전두환은 군부 내 비밀 사조직인 하나회의 결성을 비밀리에 진행합니다. 먼저 전두환, 김복동, 노태우 등의 육사 11기가 리더그룹으로 가입한 뒤, '태양을 위하고 조국을 위하는 하나같은 마음'이라는 뜻으로 조직의 이름을 하나회로 정합니다. 후배 기수들을 선발할 때에는 영남 출신이라는 점, 그리고 선배에 대한 충성심과 의리가 있어야 한다는 기준으로 선발했으며, 각 기수당 인원은 10명 정도로 합니다.

하나회의 중심 육사 11기 전두환(좌) 노태우(가운데) 김복동(우)

 

그렇게 한 명이 각 기수에서 선발되면 육사11기 전원이 동의해야 입회할 수 있었습니다. 입회한 후배 회원은 이른바 포섭책이 되어 동기생들을 엄선해 보고했으며, 엄선된 후배들은 같은 방식의 과정을 거친 뒤에야 입회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물망에 오른 후배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졸업성적, 교우관계, 건강, 부인의 사생활까지 심사를 거쳐야 했고습니다. 진급과 보직에서의 특혜를 받을 수 있는 하나회의 가입을 권유받은 사람들은 최고의 영예로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까다로운 인선 작업으로 1년 반 정도가 지나 제대로 된 모습을 갖추게 된 하나회는 1964년 3월 1일 김복동의 집에서 결성식을 갖습니다. 김복동의 말에 따르면 그들은 3.1운동의 의미를 되새긴다는 뜻에서 3월 1일에 결성식을 가졌다고 합니다. 

하나회 결성

 

이후 하나회는 선후배간의 합의된 명령에 복종하고 회원 간에는 경쟁하지 않으며 이를 위반할 시에는 인격말살까지 감수한다는 강령아래 200여 명이 넘는 군부내 사조직으로 성장합니다. 후배 회원들이 선배를 부를 때는 '형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했으며, 점조직으로 연결되어 있어 리더그룹인 육사11기 외에는 회원들 간에도 서로의 정체를 모르며 지냈습니다. 

 

 

  성장하는 하나회

그렇게 하나회가 결성되고 그 조직의 수장인 전두환은, 동기들 중 소령 진급은 가장 느렸으나 1969년 육사 11기 중 가장 먼저 대령 계급장을 달았고, 1973년에는 역시 동기들 중 가장 먼저 준장으로 진급합니다. 이때 박정희는 전두환을 청와대로 초대해 '일심'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지휘봉과 함께 크라운 6기통 승용차를 주기도 했습니다.

전두환(좌)과 박정희(왼쪽에서 두번째)

 

그렇게 박정희의 총애를 받던 전두환은 윤필용, 강창성 등 군에서 영향력있는 선배를 찾아가 형님, 형님하며 용돈을 받은 뒤 후배들에게 술을 사주었고, 하나회 후배들의 진급과 보직 청탁을 하고 다닙니다. 그리하여 하나회의 회원들은 수경사, 보안사, 특전사, 대통령경호실 등에서 근무했고, 해외파견 등의 특혜를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1973년, 하나회에도 위기가 찾아옵니다. 하나회의 뒤를 봐주던 윤필용이 이후락을 박정희의 후계자로 거론해 박정희의 심기를 건드린 것입니다. 이때 박정희는 윤필용을 포함한 하나외와 전두환에 대한 조사를 지시했고, 전두환은 군복을 벗을 뻔합니다. 하지만 당시 경호실장 박종규 덕분에 전두환은 군에서 살아남습니다. 

 

군에 남게된 전두환은 이후 대통령경호실 작전차장부 제1사단장을 거쳐 1979년 3월, 보안사령관에 임명됩니다. 

 

 

  12.12 군사반란

전두환이 보안사령관으로 근무한 지 7개월 정도가 지난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가 박정희를 총으로 쏘아 죽입니다. 권력의 공백이 생겼던 이때 전두환은 10.26 사건에 대한 합동수사 본부장으로 임명되며 권력의 한 축이 됩니다. 합수부장이라는 권력을 쥔 전두환은 정부 각 부처로부터 직접 업무보고를 받는 등의 월권을 행사합니다. 

 

그러한 월권이 지나치다 싶은 육참총장 정승화는 전두환을 비롯한 하나회 핵심 멤버들을 전출시키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하지만 이 소식을 접한 전두환이 한발 더 빠르게 움직였고, 그는 보안사 3인방과 함께 12.12 군사반란을 계획합니다. 

보안사 3인방 왼쪽부터 허화평, 허삼수, 이학봉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은 하나회 세력들과 함께 자신에게 방해가 되는 정승화를 대통령 권한대행 최규하의 재가 없이 연행합니다. 이 과정에서 정승화의 세력으로 전두환에 대항하던 장태완, 정병주, 김진기 등의 인물등릉 무력화 시키며 군권을 완전 장악합니다.

 

결국 12.12 군사반란은 성공하였고, 이후 전두환, 노태우를 비롯한 하나회 멤버들은 최고의 권력자리, 군 관련 요직을 모두 차지하게 됩니다. 

 

 

  하나회 멤버들의 전성기

1980년대 전두환 노태우 정권 10년의 세월은 하나회의 전성시대입니다. 하나회 멤버들을 하나씩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전두환은 12.12 이후 1980년대 초반 진급 시기보다 빠르게 중장으로 진급했고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직하다 육군 대장으로 예편한 뒤 통일주체 국민회의를 통해 제 11대 대통령이 됩니다. 

 

12.12에서 전방의 9사단 병력을 빼낸 노태우는 수경사령관, 보안사령관을 거쳐 제5공화국에서는 정무 제2장관, 체육부, 내무부 장관 자리에 있다가 제13대 대통령이 됩니다. 

 

전두환의 친구였던 정호용은 특전사령관, 육참총장을 거쳐 대장으로 예편한 뒤 내무부, 국방부 장관의 자리를 맡았으며 재선 국회의원이 됩니다. 

 

유학성 역시 대장으로 예편한 뒤 중정부장 자리에 있다가 3선 국회의원이 됩니다.  황영시는 육참총장을 거쳐 대장으로 예편, 감사원장이 되었습니다.  김복동은 육사교장을 거쳐 재선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유학성, 황영시, 김복동

 

보안사 3인방이라 불리던 허화평, 허삼수, 이학봉은 제5공화국에서 비서관 자리에 있다 국회의원이 됩니다. 

허화평, 허삼수, 이학봉

직속상관인 장태완을 배신한 장세동은 중장으로 예편한 뒤 대통령 경호실장 자리를 거쳐 안기부장이 되었으며, 장태완을 체포한 신윤희는 육군 헌병감 자리에 있다가 소장으로 예편합니다. 12.12에서 국방부와 육본을 장악했던 박희도는 특전사령관, 총장을 거쳐 대장으로 예편했습니다.

장세동, 신윤희, 박희도

 

정병주를 체포했던 최세창은 제1군단장, 합참의장으로 있다가 대장으로 예편한 뒤 국방부 장관이 됩니다. 김진영은 수경사령관, 육참총장을 거쳐 대장으로 예편합니다. 

최세창, 김진영

 

  하나회 숙청의 시작

하나회는 1993년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면서 몰락하기 시작합니다. 김영삼은 1990년 3당 합당을 한 뒤 제14대 대선에서 당선되어 문민정부를 출범시킵니다. 대통령에 당선된 그는 취임 이틀 뒤 자신의 재산을 먼저 공개하더니 공직자들에게 재산을 공개하도록 합니다. 

 

며칠 뒤 육군사관학교 졸업식에 참석한 김영삼은, '올바른 길을 걸어온 대다수의 군인에게 돌아가야 할 영예가 상처를 입었던 불행한 시절이 있었다. 함께 이 잘못을 제자리에 돌려놓아야 한다'는 말을 합니다.

육군사관학교 졸업식에 참석한 김영삼

 

그리고 대통령에 취임한 뒤 열하루째인 3월 8일 아침 7시 30분경, 김영삼은 문민정부 초대 국방부장관인 권영해와 조찬을 하던 중 대뜸 군장성들은 언제 바꿀 수 있는지 물어봅니다. 이에 권영해는 대통령이 통수권을 행사한다면 언제든지 가능하다 말했고, 이 말이 끝남과 동시에 김영삼은 육군참모총장과 기무사령관을 교체해야겠다고 말합니다. 그로부터 4시간이 지난 11시경 차기 합참의장이 될거라 믿고있던 당시 육참총장 김진영과 기무사령관 서완수는 권영해로부터 해임을 통보받고, 그들의 후임으로는 비하나회 출신이 임명됩니다. 

 

 

  하나회 숙청 과정

육참총장과 기무사령관의 교체로 시작된 하나회의 청산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습니다. 김영삼이 육참총장과 기무사령관을 교체한 지 3주 정도가 지났을 무렵, 하나회의 존재와 그 명단이 세상에 알려지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1993년 4월 2일 아침, 서울 동빙고동의 군인아파트 출근길에 장교들은 우편함과 승용차 윈두우 브러쉬에 꽂혀진 의문의 유인물을 발견합니다. 그 유인물에는 당시 현역 중장급인 육사20기부터 중령급인 36기까지 하나회 140여명의 명단이 담겨있었습니다. 이 명단에 오른 군인들은 대부분 장군 1차 진급자들로, 국방부, 합참, 육본 등의 핵심보직이나 사단장, 군단장 등의 보직을 맡고 있는 인물들이었습니다. 또한 영관급 장교의 경우도 청와대, 수방사, 기무사 등의 핵심 부대를 비롯해 주요 정책 분야에 있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며칠 뒤 이 사건은 비하나회 백승도라는 인물이 단독으로 한 행동이라고 밝혔고, 한달 여간의 수사 끝에 군당국은 명단에 이름을 올린 142명 중 105명이 실제 하나회 회원이라는 결과를 발표합니다. 이렇게 군 내 사조직인 하나회가 세상에 밝혀지자 하나회 회원들에게 인사상 불이익을 받던 군인들은 분노했고, 사회적으로도 큰 파장을 일으킵니다.  

 

김영삼은 이때가 하나회를 숙청할 적기라고 판단하였고, 4월 2일 수방사령관, 특전사령관 자리에 있던 하나회의 멤버 안병호와 김형선을 해임시킵니다. 4월 8일에는 제1군, 제2군, 제3군 사령관 자리에 있던 하나회 멤버들을 비하나회 인물들로 교체했고, 4월 15일에는 하나회 출신 군단장, 사단장급 인사들까지 자리에서 물러나게 합니다. 

 

당시 비서실장이었던 박관용의 말에 따르면, 하나회 출신 대장 7명을 포함해 장성 19명을 해임시켰던 여기까지가 김영삼의 최초 의도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때까지만해도 하나회의 수뇌부들만 날렸고, 일부 장성들과 영관급 이하는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하나회  완전 척결

하나회의 수뇌부가 날라간 뒤 3개월 정도 지난 7월 초반, 남은 하나회 멤버들마저 강제전역하게 됩니다. 7월 9일 합참 간부들이 모인 한 회식자리에서 남은 하나회의 멤버였던 당시 합참 작전부장 이충석이 이러한 말을 합니다. 

 

'군을 이런 식으로 막 해도 돼? 새정부 출범 후 군이 일방적으로 매도당하고 있는데, 수뇌부가 소신을 밝히지 못하고 있어! 하나회 출신들의 업적도 많은데, 모두 제거한다는 것은 잘못이야! 새정부가 장군들을 대하는 태도에 문제가 있어!'

 

그는 김영삼에 대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냈고, 술병을 집어 던지는 등의 난동을 부렸습니다. 이를 전해들은 김영삼과 비하나회로 구성된 군수뇌부는 군통수권자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고, 이 사건으로 인해 그동안 일부러 건드리지 않았던 나머지 하나회 출신 장성과 영관급 장교들까지 모두 숙청하기로 마음 먹습니다. 

 

사건을 일으킨 이충석은 보직 해임과 동시에 강제전역되었고, 하나회 출신 영관, 위관 장교들도 대부분 예편 또는 좌천되었습니다. 이후 하나회는 단계적으로 제거되어 과거의 위세와 권력을 완전히 잃게 되었으며, 그 세력이 군에서 사라졌습니다. 

 

  김영삼에 대한 평가 

그렇게 하나회는 청산되었고, 김영삼은 하나회 청산, 공직자 재산공개, 금융 실명제 등의 시행으로 임기초반 지지율이 80%까지 치솟습니다. 하지만 정권 후반기 문민정부의 소통령이라 불린 차남 김현철의 비리와 IMF외환위기로 인해 그에 대한 지지율은 8%까지 떨어지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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