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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잼 ★/기타 후기

장태완 장군 :: 12.12사태 당시 전두환에 맞선 수경사령관의 일생

by 꿀돈잼 2023. 11. 12.

 

12.12사태, 12.12 군사반란 당시 전두환과 하나회에 맞서 끝까지 나라를 지키려고 한 수경사령관 장태완의 일생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수경사령관이 되기까지의 과정, 12.12사태 당시의 상황, 그 이후 불행한 가족사 이야기까지 있으니 끝까지 읽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군인 장태완

장태완은 1931년 경북 칠곡에서 태어납니다. 이후 대구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했고, 1950년 6.25가 일어나자 열아홉의 나이에 육군종합학교 11기로 들어가게 됩니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2월 육군 소위로 임관해 동해안 전선에서 군생활을 시작합니다. 

 

1953년 휴전이 되자 그는 미육군보병학교, 육본정보참모부 등에서 군생활을 이어갑니다. 1965년에는 채명신에게 발탁되어 월남전에도 참전했으며 마침내 1971년 마흔의 나이에 정규 육사 출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준장으로 진급하게 됩니다. 이후 장태완은 소장으로 진급해 26사단장으로 근무합니다.

 

 

  하나회와의 악연

장태완은 12.12사태 이전부터 하나회와의 악연이 있었습니다. 장태완이 수도경비사령부 참모장일 때의 일입니다. 이때 갑종 장교 출신인 자신을 깔보며 항명하던 육사 출신 김상구를 영창 보내는 일이 발생합니다.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1976년 6월, 장태완은 예고없이 반공진지공사 현장에 순시를 나갑니다. 그러나 그가 한참 공사판을 걸어서 들어가는 동안, 아무도 마중나오는 사람이 없었고, 위병은 뒤늦게야 이를 알아차립니다. 그렇게 장태완이 막사 앞에 다 와서야 대대장이었던 김상구 중령이 나와 경례를 합니다. 김상구는 육사 출신으로 하나회의 핵심 멤버였으며, 하나회의 보스였던 전두환과는 동서사이였습니다.

 

김상구를 앞세워 공사현장에 간 장태완은 태만한 공사현장을 보고 더욱 화가 나 "이렇게 모자란 놈이 어떻게 대한민국 장교가 되엇나"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김상구 중령은 고개를 뻣뻣이 들고 대들며 "저도 육사에서 배울만큼 배우고 임관한 장교입니다. 장교의 명예를 짓밟는 그 말씀을 취소해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장태완은 자신에게 이렇게 대드는 것이 하나회라는 배경때문이라는 생각에 더욱 화가 납니다. "제대로 일도 못하는 놈이 누굴 믿고 건방지게 굴어?" 라고 말하자 김상구는 장군에게는 할 수 없는 말을 합니다. "내가 당신보다는 군사학을 더 공부하고 임관했어" 

 

그렇게 사령부로 돌아온 장태완은 이를 참지못하고 결국 김상구를 영창에 보냈으며, 김상구는 영창에 갔다와 전역합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하나회의 장교들은 장태완에게 깊은 유감을 품었으며 김상구의 손윗동서인 전두환 또한 장태완에게 악감정을 갖게 됩니다. 

 

 

  12.12 사태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에게 암살당합니다. 이에 국가는 계엄체제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 사건 이후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아 10.26 사건을 조사합니다. 혼란스러운 시기가 이어지던 1979년 11월,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는 장태완을 수도경비사령관으로 임명합니다. 전두환의 권력이 커지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 정승화가 선택한 카드였습니다. 수도경비사령관은 서울을 지키는 막중한 임무를 가지고 있었으며, 현병, 특공, 그리고 방공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지휘관이었습니다. 

(좌) 10.26 // (우)수경사령관으로 임명되는 장태완

 

그러다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과 정승화 사이에서 마찰이 발생하고, 조사를 명분으로 전두환이 정승화를 납치하는 이른바 12.12 군사반란이 시작됩니다. 신군부 세력이 정승화 사령관을 강제로 연행하여 권력의 주도권을 가져오려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전두환은 쿠데타의 협조 가능성이 낮다고 생각한 장군들은 따로 불러 연회를 열어 그들의 발을 묶어두려고 합니다. 여기에는 전두환과 끝까지 싸운 장태완 수경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 김진기 헌병감이 있었습니다.

(좌)장태완 / (가운데)정병주 / (우)김진기

 

그렇게 술을 마시던 중 그들은 정승화 사령관이 연행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장태완은 즉시 수도경비사령부로 달려갑니다. 수경사로 돌아온 장태완은 놀라운 사실을 보고받게 됩니다. 수경사 중에서도 성역부대라고 할 수 있는 경복궁 제30경비단에 전두환과 노태우를 비롯해 차규헌, 유학성, 황영시 그리고 정병주의 지휘를 받아야 될 1공수 박희도, 3공수 최세창, 5공수 장기오와 자신의 부하인 장세동, 김진영 등이 모여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장태완은 이들에게 전화해 정승화를 즉각 풀어주라고 요구합니다. 장태완과 친분이 있던 유학성, 황영시 등은 전화를 돌려받으며 장태완을 회유하려 했으나 장태완은 이를 거부하고 반란군을 막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닙니다. 정병주 사령관과 작전을 논의하고 전차중대를 보내 반란군의 일당을 제거하려고도 생각했습니다. 이들은 아직 하나회에 넘어가지 않은 9공수에 보안사를 공격하라고 지시합니다. 당시 정병주 사령관 밑에 있던 1,3,5 공수는 이미 반란군의 편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보안사는 매우 당황합니다. 자신의 세력이었던 1,3공수보다 9공수가 서울에 더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9공수가 보안사를 공격하면 반란을 성공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좌) <코리아게이트> 장태완 역의 김동현 배우 // (우) <제5공화국> 장태완 역의 김기현 배우

 

그러나 신사협정 체결 때문에 상황은 급변합니다. 반란군에서는 9공수를 출동시키지 않으면 자신들도 무력동원을 하지 않겠다고 제안합니다. 이는 반란군의 거짓 신사협정이었으나 육군본부 수뇌부는 이를 수락했습니다. 김일성을 눈앞에 두고 아군끼리 싸우는 것은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9공수가 자신의 부대로 되돌아가자 전두환은 1공수로 하여금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점령하라고 지시했으며, 3공수에게는 정병주 사령관을 체포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렇게 육군본부와 국방부는 반란군에 의해 점령되었으며, 정병주 사령관도 체포됩니다. 이제 남은 것은 장태완 장군과 수경사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수경사 내에서도 반란군에게 회유당하지 않은 부대는 비전투 부대뿐이었습니다. 이때 장태완은 행정병과 취사병까지 끌어모으로 남은 전차중대를 소집하여 다음과 같은 명령을 하달합니다. 

 

첫째, 장세동, 김진영, 조홍 등을 발견 즉시 체포 또는 제거하라.

둘째, 제30경비단에서 반란 역모하는 자들의 명단을 공개하니 발견 즉시 체포 또는 제거하라. 

셋째, 여기 없는 동료 장교들을 최선을 다하여 설득하여 본대로 복귀시켜라. 그러면 모든 것을 불문에 부치지만 끝까지 역모에 가담하겠다면 발견 즉시 체포 또는 제거하라. 

넷째, 각 외곽 검문소의 출입을 철저하게 검문검색하고 수상한 자는 별도 조사 후 조치하라. 

다섯째, 방송국 및 각 검문소 병력을 분대 규모에서 소대 병력으로 증강하라. 

여섯째, 현재 반란군에 가담하고 있는 청와대 뒷산 팔각정 주변에 배치된 병력을 제33단 부단장이 가서 설득하여 은밀히 사령부로 철수시키도록 노력하라. 

일곱째, 사령부에 잔류한 전차4대, 로켓포 등 가용한 모든 화포는 탄약 상자를 개봉하여 완전히 차량에 탑재하여 자체 방어에 임하라. 

 

그러나 누가 어디에서 언제 배신할 지 몰랐고, 하나회의 도청은 계속되었으며 국방장관마저 반란군에 항복하여 장태완도 결국 보안사 공격을 포기합니다. 그렇게 12월 13일 새벽4시경 장태완은 신군부 세력에 붙잡혀 보안사로 끌려가 45일간 조사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1980년, 30년의 군생활을 마치고 불명예스럽게 예편당하는 비운을 겪습니다. 

 

그는 당시 상황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하나회원들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납치했을 때 이미 대세가 기울었다. 그러나 진압 책임을 진 내가 백기를 들 수 없었고, 죽기로 결심하니까 마음이 편안해졌다."

 

 

  12.12사태 이후 계속되는 불행

장태완은 서빙고에서 모진 고초를 받고 가택연금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장태완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들도 끔찍한 일을 겪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올바른 일을 하다가 반란군에게 모진 고초를 겪고 있다는 사실에 분개하고 한탄하여 막걸리로 끼니를 대신하다 결국 세상을 떠납니다. 

 

아들 또한 의문사합니다. 장태완의 아들은 가택연금을 겪으면서도 서울대학교에 입학할 정도로 자랑스러운 아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느날 집을 나선 후 행방불명 되었고, 한달 만에 야산에서 시체로 발견됩니다. 

 

여기에 자신과 함께 전두환에 끝까지 맞선던 정병주 사령관 또한 인근 야산에서 시체로 발견됩니다. 정병주는 강제예편된 이후에도 12.12 사태에 대한 부당성을 주장해왔었습니다. 그러나 행방불명되엇고, 야산에서 시체로 발견됩니다. 당국은 그가 자살한 것으로 사건을 종결지었으나 장태완은 그가 자살할 사람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명예회복, 사망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고 군사반란의 책임을 물어 전두환과 노태우가 재판장에 서게 됩니다. 이때 장태완은 증인으로 채택됩니다. 증언을 마친 후 장태완은 전두환과 노태우에게 "한때는 함께 국방에 열심히 다하던 입장이었는데 어쩌다 그리 되었는지 모르겠어..."라고 말합니다. 

 

 

2000년도에는 새천년민주당의 인재영입에 따라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당선됩니다. 이후 박정희 기념사업의 이사를 맡기도 합니다. 여기서 장태완은 박대통령이 하나회를 비호했던 것이 반란의 원인이 되었다며 박정희를 비판하기도 합니다. 

 

장태완은 2010년 7월 26일, 향년 78세로 별세합니다. 이때 장태완을 배신했던 장세동이 빈소를 방문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2년뒤 장태완의 부인이 유서를 쓰고 세상을 떠납니다. 이 부부는 생전 금실이 유난히 좋았습니다. 그러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부인이 극심한 우울증을 알아왔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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