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이승만 대통령의 노력과 일대기를 다룬 영화 건국전쟁이 인기입니다. 오늘은 영화 건국전쟁을 본 관람평, 후기와 영화를 본 후 이승만에 대해 찾아본 정보들을 정리해보았습니다.
1. 천재성
이승만은 일찌감치 조선의 독립을 위해 외교가 중요하다는걸 깨달았고 1904년 한성감옥 출소하자마자 30세의 나이로 미국 갔습니다. 영어는 17세 무렵 배제학당에서 미국선교사를 통해 6개월만에 마스터했습니다. 곧바로 조지워싱턴대로 갔는데, 총장은 인터뷰 후 "배제학당 수준이 이정도냐"하며 곧바로 3학년으로 편입시킵니다.
졸업 후 하버드를 거쳐 프린스턴 박사학위(1910년)까지 단 6년만에 주파하는 실력자였습니다. 배제학당이 우수한게 아니라, 이승만이 천재였던 것이었죠. 미국에 있는 동안 현지 각종단체에서 170여회 순회강연을 하였습니다. 상하원 의원들은 물론 루즈벨트대통령까지 만날 정도로 인정받은 인물이었습니다.
2. 반일주의자
25세 한성감옥에 있을때 언젠가 일본과 미국이 태평양을 두고 한판 붙는다며 세계정세를 분석해 쓴 원고를 바탕으로 '일본내막기(Japan inside out)'란 책을 1941년 6월에 미국에서 출간하였습니다. 이 책에서 일본이 선제적으로 행동을 취하기 전에 일본을 공격해야한다고 역설했습니다. 6개월후 진주만공습이 터졌습니다. 예언서로서 일약 베스트셀러로 등극하였습니다.
독도를 지키는 데에도 이승만라인이 결정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친일인사로 내각을 구성했다는 비판이 있으나 북한은 더했는데 이에 대한 비판은 하지 않습니다. 공산주의에 협력만 하면 싹다 덮어줬고 등용까지 한 것이었죠. 영화에서는 '반민족행위'와 '친일'은 구분되어야한다며 정의조차 명확하지 않은 친일이란 용어를 개탄하였습니다.
3. 초라한 독립군 규모
당시 일본군은 동원령 선포해서 700만명 규모의 대군이었습니다. 반면, 독립군은 아무리 통계를 긁어모아봐야 3천명 규모에 불과했습니다. 용기 있는 분들이었지만 현실적으로 이길 수가 없음을 누구보다 먼저 깨달은 것이 이승만이었습니다. 그가 진작부터 외교에 올인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4. 김구의 이중성
김구는 초대정부 대통령 시켜주겠다는 김일성 말에 솔깃해서 북으로 넘어가서 김일성을 만납니다. 그러나 한반도 전체를 적화하려는 소련의 시나리오의 일환이었고, 당시 회의록 같은 걸 보면 김구도 그게 소련 시나리오라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북한에 다녀온 후 김구와 주한 대만대사 류위완과의 대화록이 2009년 9월 공개되었는데, 거기서 김구는 "북한이 곧 쳐내려오는데 남한은 지금부터 무슨 대비를 해도 못막는다. 한반도 전체가 곧 북한한테 넘어갈텐데 내가 왜 이승만 도와서 단독선거 치르냐"라고했습니다. 근데 대국민 공식 성명자리에서는 "여러분 이북은 절대 우리를 공격하지 않습니다" 라고 말하며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 것이 김구이기도 합니다.
5. 토지개혁
서구학자들은 근대 신생국가들의 토지개혁 모델 중 이승만 모델이 최고라며 극찬하고 있습니다. 북한 토지개혁은 땅주인만 국가로 바뀌었을뿐 농민들은 소작농신세를 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남한은 이승만 토지개혁으로 그 이전 12%에 지나지 않던 자작농 비율이 80%까지 급등했습니다.
6.25 때 북한은 남한의 소작농들이 자신들에게 합류해 줄라고 예상했으나 땅을 가진 농민들이 결사항전하기도 했는데, 이승만의 토지개혁 덕분이었습니다. 또 대지주로부터 토지를 몰수할 때 학교를 지으면 땅 몰수 제외시켜주었습니다. 이 때문에 사학재단이 엄청나게 생겨나고 국민들이 배우고 문맹이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승만시절 대학생 숫자로만 세계 4위를 차지합니다. 20대 한성감옥시절, 사학을 바탕으로 한 미국의 탄탄한 교육제도에 대해 쓴 글이 있는걸로 봐서 그때부터 구상을 했던것 같습니다.
6. 여성인권
하와이에서 활동할 때 길에서 구걸하는 어린 여자애들 생김새가 조선인 같아서 알아보니 거기 한인들이 딸이 태어나면 걍 길에 버렸던 것이었습니다. 이에 화가난 이승만은 즉시 여자기숙학교 만들고 그 아이들을 비롯한 한인 딸들 싹다 학교로 데려와서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여자기숙학교를 세울때 학교에 남긴 글이 "조선에서 천한 것이 계집아이이다. 이거 잘못됐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애비한테 팔려와서 감금돼있던 10대 여자아이 난투 끝에 탈출시킨 기록도 있습니다.
1948년 초대 대통령 선거시 여성에게도 투표권이 주어졌습니다. 이는 페미 운동 결과물이 아니라 이승만의 결단이었습니다. 심지어 스위스보다 빨랐습니다.
7.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
6.25때 한강 인도교 폭파시킨 것과 관련하여 피난민들이 다리위에 가득할 때 터트려 수백명 죽은 걸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실제로는 다리옆에 민간인용 부유잔교를 따로 만들어서 피난민들은 다리에 오르지 못하게 했고 폭파작전시에는 민간인들 싹다 통제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작업 실수로 경찰차량들이 큰 피해를 보면서 경찰관 77명 사망하기는 하였습니다. 작전명령은 정해져있던 전시작전계획에 따라 미군쪽에서 내린것이었다는 게 유력 하지만 꼬꼬무 기타 아류 예능에서는 이승만이 피난민 수백명 죽였다며 사실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불과 얼마전까지 연합뉴스에서도 800명 죽었다는 기사를 내었습니다. 이 800명 사망설의 근원은 신기철 인권평화연구소장으로, 2013년 자신의 논문에 적었다가 입증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자 2016년 '민간인 피해가 없었다'고 논문을 정정하였습니다. 근데 사람들은 정정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습니다.
8. '런승만'에 대하여
"국민여러분 안심하고 서울을 사수하십시오"라고 방송해놓고 지혼자 부산 도망갔다며 런승만이라는 밈이 일반적이지만, 이승만은 저말 한 적이 없습니다. 남아있는 녹음파일을 보면, "의정부 못지켰다. 북괴가 서울로 오고있다. 그러나 맥아더장군이 우릴 돕기로 했으니 희망을 잃지 마시라"였습니다.
오히려 서울함락 하루전까지 서울에 있었습니다. 안피했으면 잡히고 전쟁 끝나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미군장성,병사들은 '호랑이'와 같은 표현을 써가며 이승만을 용맹했던 지도자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반면 김일성은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마자 식구들데리고 만주로 차까지 버리고 도망가지만 이에대해서는 사람들이 언급하지 않습니다.
9. 한미방위조약
미국은 중공 개입후 전쟁이 길어지자 탈출각을 재고 있다가 휴전 얘기가 나오니 좋다고 협상테이블로 달려갑니다. 이승만은 휴전에 반대했지만 씨알도 안먹혔습니다. 중공군 100만이 주둔해 있는 상황에서 휴전하고 미군 철수하면 그후에 어찌될지 모르는 위태한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이승만은 전향을 희망하는 인민군 반공포로 2만7천명을 "유엔 통제 좆까라 그래!!" 하고 기습 석방해버립니다. 북한, 중국, 소련이 열받았고 휴전협정이 이루어지지 못할 위기에 처합니다. 미국은 이승만을 달래기 위해 한미방위조약을 체결하고 각종 지원도 엄청 약속하였습니다. 후진국이 선진국을 향한 협상 중 최고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한반도는 6.25 전 70년 동안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비롯한 7번의 큰 정쟁을 겪었던 화약고였으나, 한미방위조약 그후 현재까지 100명 이상 죽은 전투가 한차례도 없었음을 통해 이를 알 수 있습니다.
10. 민주주의
민주주의는 초기에 탄탄한 경제·사회적 수준 및 국민적 의식기반이 있지 않으면 무조건 실패한다는 게 학계의 정설입니다. 그런데 이승만은 아무것도 없는 미개한 조선땅에서 미친척하고 곧바로 민주주의를 시작하였고, 성공적으로 뿌리를 내립니다.
제헌국회 선거부터 초대 대통령 부통령선거를 비롯한 선출직 선거를 엄청나게 많이 하였습니다. 재임기간인 1948년부터 1960년까지 총 10회의 선거를 치릅니다. 어린학생들은 그 하찮은 반장도 선거를 통해 뽑아야 한다는걸 체득하며 성장하였습니다. 4.19로 하야했을때 대만 장제스가 위로서신을 보내자 이승만은 "실패한 게 아니오. 국민들이 부정선거를 보고 참지 않았으니 이는 성공한 것이오"라고 답신하였다고 합니다.
11. 4.19 즉시 하야
3/15부정선거는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한 작당이었습니다. 이승만의 경쟁자 조병옥이 병사함에 따라 단독출마가 되어 사실상 부정선거를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즉, 이승만과 무관한 부정선거였습니다.
4.19가 터진 당일 병원으로 가서 부상자를 살폈고, "내가 맞을 총탄을 젊은이들이 대신맞았다"며 울먹였다 합니다.시위대가 계속 죽어나가자 망설이지 않고 8일만에 하야를 결정하였습니다. 자택인 이화장으로 가는 길에 시민들이 나와서 도열하여 예우를 갖추기도 했습니다.
12. 하와이 망명
이승만은 하야 후 한 달 정도 후 약 2주~한달간의 휴양을 위해 하와이행 비행기를 탑니다. 왜 단기 휴양이냐하면 짐이 달랑 4개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근데 경향신문에서 잠복취재하다가 공항까지 가서 마이크 들이밉니다. "지금 심경이 어떠십니까?"라는 기자의 질문에 "무슨 말을 하겠소, 이대로 떠나게 해주오"라고 간단하게 답하고 비행기에 오릅니다.
그런데 바로 그날 오후 경향에서 대통령이 망명 갔다고 호외를 뿌립니다. 만약 "망명가는 심경이 어떠십니까?"라고 물어봤으면 당연히 다른 대답이 나왔을 것입니다. 이승만은 결국 귀국하지 못하고 마음의 상처와 몸의 병으로 고생하다 5년 후 서거하였습니다.
이승만이 스위스 계좌에 수천만불 있다는 식의 안민석급 찌라시 레카들이 설쳤지만 이승만은 돈이 없었고, 병원비도 제대로 대지 못했을 정도였습니다. 현지에서 도와준 교민에게 자신의 서울집을 양도하는데, 돈이 있었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13. 이승만 죽이기
서구의 근대사 전문가들은 이승만을 '민족주의자' + '반공주의자' + '집념' 3 in 1을 갖춘 근현대 유일한 지도자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혼란의 시기 국제정세를 빠르게 읽고 공산당은 망한다는 것을 일찍 깨닫고, 미국과 연대로 코앞의 북한,중공,소련의 침략을 막아내고 남한에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설립한 이승만 1인이 해낸 역할은, 이순신 급이라고 평가합니다.
서구학자들은 한반도가 적화되었으면 미얀마급 정도의 외톨이 국가가 되었을거라 평가합니다. 당연히 북한에서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흔들어야 하므로 이승만 죽이기에 몰두합니다. 1995년 방북했던 한 인사에 따르면, 그 때도 거리에 "이승만 괴뢰를 물리치자"라는 선전구호가 적혀있었다고 합니다. 북괴는 피해자위주의 역사인식을 끊임없이 건드렸고, 이에 좌파들이 선동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뒤져봐도 이승만의 자리를 대체할만한 근현대 정치인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서구 학자들은 다른 나라와 다르게 국부를 역사에서 파내고 있는 한국새끼들이 당최 이해가 안간다며 어리둥절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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