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을 보고 고려의 역사에 관심이 생겨 교과과정에서는 제대로 배우지 못했던 고려의 장군들에 대해서 알아보고 있습니다. 제 블로그를 보시면 지채문, 강조, 양규 등 다양한 장수의 실제 역사 이야기를 보실 수 있으니 함께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오늘은 강민첨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합니다. 귀주대첩하면 '강감찬'이 떠오르실 텐데요. 강민첨은 제3차 여요전쟁에서 상원수 강감찬을 도와 부원수로서 제3차 여요전쟁과 귀주대첩을 승리로 이끄는 장군입니다. 강민첨의 실제 역사 이야기 이제 부터 함께 보시죠.
제2차 여요전쟁, 서경방어
고려사 강민첨 열전에 따르면, 그는 진주의 진강 사람으로, 고려 7대 왕인 목종 때 과거에 급제했다합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서생에서 벼슬에 오른 사람으로 무예와는 거리가 멀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기개가 굳고 과단성이 있었기 때문에 문신이었지만 군사적으로 많은 업적을 세워 이름을 날릴 수 있었습니다.
강민첨이 처음으로 활약하는 시기는 고려의 8대왕 현종의 재위원년인 1010년입니다. 당시 요나라의 황제 성종이 목종을 시해한 강조의 죄를 묻겠다며 무려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합니다. 제2차 여요전쟁이 시작된 것이죠. 요나라 군은 통주에서 강조의 30만 대군을 격파한 뒤 승세를 타고 곽주, 안북부, 숙주를 연달아 함락시킵니다. 이후 그들은 계속해서 남하하여 이번에는 고려의 제2의 수도인 서경을 위협합니다.
<고려거란전쟁> 강조 :: 실제 역사 이야기, 평가 정리!
이에 고려의 현종은 당시 동북면을 지키고 있던 지채문에게 명하여 군사들을 이끌고 서경성을 지원하도록 합니다. 이후 동북계 도순검사 탁사정의 군대까지 서경에 도착하면서 서경성은 마침내 항전태세를 갖추게 됩니다. 하지만 얼마 뒤, 요나라 성종의 본대가 서경성을 포위하자 겁에 질린 탁사정이 성에서 몰래 빠져나와 도주합니다. 또한 탁사정에게 속은 대도수와 휘하 군사들은 요나라에 항복하기도 합니다.
바로 이때, 강민첨이 첫 활약을 펼칩니다. 고려사 지채문 열전에 따르면, 당시 서경의 장수들이 뿔뿔이 흩어져 버리고 성 안의 민심이 흉흉하게 되었습니다. 통군녹사 조원과 애수진장 강민첨 등은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함께 신사에 가서 빌면서 점을 치니 좋은 점괘가 나왔다고 합니다. 참고로, 이때 강민첨의 직책은 '애수진장'인데, 이는 동북면에 있는 애수진과 관련된 것으로, 지채문 혹은 탁사정이 동북면 군사들을 이끌고 서경을 구원하러 올 때 강민첨도 같이 온 것으로 보이는 증거입니다.
아무튼 강민첨 등은 이후 점괘에 따라 조원을 병마사로 추대한 뒤, 흩어진 병사들을 수습하여 하디 항전태세에 돌입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요나라 군의 공격을 막아내며 끝까지 성을 지켜냅니다. 이때, 조원과 강민첨이 서경을 지켜내면서 요나라 성종은 서경을 포기하고 개경으로 진격합니다. 하지만 서경을 완전히 함락시키지 못해 뒤쪽의 서경군이 계속해서 큰 부담요소로 작용하게 됩니다.
(이때 지채문은 서경을 떠나 개경으로 가서 현종을 모시고 피난을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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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여진 해적 소탕
이처럼 서경 방어전에서 훌륭한 활약을 펼친 강민첨은 이후로도 계속 군사적인 업무를 맡습니다. 1012년 5월, 갑자기 동여진이 오늘날의 경북 포항일대에 침입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들은 1년 전인 1011년 8월에도 일백여 척의 배를 이끌고 경주로 침입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배를 타고 고려의 동해안 쪽으로 노략질을 다니던 무리였습니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강민첨, 문연, 이인택, 조자기를 도부서의 지휘부로 임명하였고, 강민첨 등은 주와 군의 군사들을 독려해 동여진의 해적들을 크게 무찌릅니다. 이 사건 이후 동여진 해적들의 침입 기록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마 이때 강민첨 등이 지휘하는 고려군에 상당한 타격을 입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강민첨은 1016년 내사사인으로 임명되었으며, 1018년에는 대장군의 지휘에까지 오릅니다.
제3차 여요전쟁 발발
1018년 12월, 요나라의 장수 소배압이 10만의 정예기병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하면서 제3차 여요전쟁이 시작합니다. 이에 고려조정에서는 강감찬을 상원수로, 대장군 강민첨을 부원수로 삼아 무려 20만 8,3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영주에 주둔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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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강민첨은 강감찬을 도와 흥화진에 기병 1만 2,000명을 매복시켜 놓은 뒤 동아줄로 소가죽을 꾀어 성 동쪽에 큰 냇물을 막고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소배앞의 군이 다가오자 순간 막아 두었던 물줄기를 터뜨려 적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그들을 습격합니다.
하지만 소배압의 요나라는 흥화진에서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수도인 개경으로 곧장 나아갑니다. 이에 부원수 강민첨은 기병들을 이끌고 그들을 빠르게 추격하였고, 자주의 내구산에서 요나라 군을 따라잡아 다시 크게 쳐부수는 전공을 세웁니다.
귀주대첩
이후, 요나라 군은 개경 공격을 포기하고 다시 북상하여 귀주로 갑니다. 이 곳에서 고려와 요나라의 마지막 결전이 벌어지게 됩니다. 전투 초기에는 고려군이 수적 우위에 있었음에도 양측은 막상막하로 쉽게 승부를 낼 수가 없었습니다. 뒤늦게 김종현이 이끄는 고려측 1만 기병이 귀주의 평원에 나타났고, 그들이 전장을 향해 돌격해오자 전세는 고려군 측으로 기울기 시작합니다. 게다가 갑자기 기상이변으로 요나라 쪽으로 비바람이 불기 시작합니다.
이에 고려군이 그 기세를 타고 총공격에 나서니 불리해진 요나라 군은 드디어 퇴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고려군은 퇴각하는 요나라 군을 귀주 북쪽에 있는 반력의 들까지 맹렬하게 추격하여 무자비하게 도륙합니다. 기록에 따르면 이때 강민첨은 요나라 군 1만명을 사살 및 생포하는 전공을 세웠다고 합니다. 전쟁이 끝나가 시체가 들을 덮었으며, 사로잡은 포로와 노획한 말, 낙타, 갑옷, 병장기 등은 셀 수 없을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살아서 돌아간 요나라 군은 겨우 수천 명이었다고 하니,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귀주대첩입니다.
강민첨의 죽음과 그 이후
귀주대첩에서 큰 공을 세운 강민첨은, 이후 응양군 상장군 겸 주국으로 발탁되었다가 우산기상시로 관직을 옮겼으며, '추성치리익대공신'이라는 칭호도 받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지중추사 겸 병부상서가 됩니다. 이후 그는 1021년에 눈을 감았는데, 이때 현종은 3일 동안 조회를 정지하고 태자태부를 추증하였다고 합니다.
이후 시간이 지나, 고려의 10대 왕인 문종이 즉위하자 문종은 이러한 내용의 조서를 내립니다.
"대중 상부 11년 거란이 무단히 침입했을 때, 병부상서 지중추원사 강민첨이 힘껏 싸워 반령의 들에서 크게 승리했다. 거란이 패주하면서 버리고 간 무기와 갑옷들로 다니는 길이 막힐 지경이니, 전투에서 1만 명을 사로잡거나 목을 베었다. 그 전공을 돌이켜 생각해보건대, 표창을 함이 마땅하고, 공신각에 초상을 걸어서 후세 사람들의 모범이 되게 하라. "
강민첨은 서생으로 벼슬을 한 사람으로 무예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외적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발휘하여 여러차례 전공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제3차 여요전쟁 때는 20만 고려군의 부원수가 되어 총지휘관인 강감찬을 도와 수십년 간 이어진 요나라의 지긋지긋한 전쟁에 마침내 종지부를 찍는 데 큰 공헌을 합니다. 그의 이러한 행적이 지금보다 더 널리 알려졌으면 합니다. 아울러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에서는 강민첨의 활약이 어떻게 그려질 지도 기대가 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래에는 <고려거란전쟁>에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도 많으니 함께 읽어보시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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