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가 드디어 12월에 개봉합니다. 이로써 이순신 장군의 3대 해전을 모두 영화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영화 노량의 개봉에 맞추어 임진왜란 전체 스토리를 이순신의 3대 해전과 김한민 감독의 영화를 중심으로 쭉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하 글은 유튜브 "이순신 장군의 "3대 해전 시리즈 몰아보기 (한산, 명량, 노량)"를 재미있게 보고 요약한 것입니다)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와 관련된 보다 자세한 정보는 아래글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1. 임진왜란 발발
1592년 음력 4월 13일, 조선 땅으로 일본군이 들이닥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을 통일한 후 명나라를 정벌하겠다는 생각에 먼저 그 길목에 있는 조선을 공격합니다. 그리하여 일본군은 명나라를 친다는 구실로 28만 대군을 동원해 조선을 침공하게 되었고, 이렇게 임진왜란이 시작됩니다.
조선군은 부산 함락을 시작으로 개전 20일 만에 한양까지 함락됩니다. 조선의 왕 선조는 수도 한양을 버리고 피난을 가버립니다. 하지만 일본군은 속전속결로 한양까지 쳐들어갔기 때문에 전라도는 아직 온전한 상태였습니다. 전라도는 곡창지대였기 때문에 조선군이 이곳을 빼앗기면 안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일본의 육군은 전주성 방면으로, 수군은 여수 방면으로 진격해오기 시작했습니다. 육지 방면은 웅치, 이치 전투에서 일본군을 막아내게 됩니다. 일본군이 해상으로 전라도를 공격해오는 것을 막아내는 것이 바로 '한산도 대첩'입니다.
2. 한산도 대첩 (1592년 음력 7월 8일)
일본군은 총 115척의 함선을 끌어모아 연합함대를 구성해 전라도로 향합니다. 당시 전라도 앞바다를 지키고 있던 장군이 이순신이었으며 조선수군의 전력은 판옥선 55척이었습니다. 일본수군의 대장은 와키자카 야스하루였습니다. 수전에 정통하던 와키자카는 자신의 73척 함대만으로도 충분하다 판단해 독단적으로 출진합니다.
이순신은 압도적인 승리를 통해 일본수군이 전라도로 오지 못하게 해야했습니다. 이에 '학익진'을 펼치기로 마음먹습니다.
조선수군이 학익진을 펼친다는 것을 알게된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학익진이 넓은 대신 얇기 때문에 쐐기대형으로 한 점을 노리고 들어가기로 합니다. 일본군은 조선군을 급습할 계획을 세우지만 이 계획을 간파한 이순신과 조선 함대는 견내량으로 출동합니다. 이것이 한산도 대첩의 시작입니다.
학익진은 넓은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좁은 견내량에 있는 일본군을 한산도 앞바다까지 끌고와야 했습니다. 이에 이순신은 6척의 판옥선을 견내량으로 기습공격을 시킵니다. 기습을 준비하던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오히려 자신이 기습을 당하자 당황합니다. 그리고 이를 타개할 방법으로 전 함대를 출동시켜 맞대응하기로 마음먹습니다. 어차피 기습 작전이 실패한 것 역습을 하자는 생각이었습니다. 이를 본 조선군 6척의 판옥선은 싸우는 듯하다가 포기하고 도망치기 시작합니다.
6척은 나머지 조선군 판옥선을 만나는데, 여기서 이순신은 다시 모든 판옥선을 견내량 밖으로 후퇴시킵니다. 와키자카는 이것을 보고 자신의 전략이 통했다고 생각하며 더 추격합니다. 그렇게 일본 수군 전 함대가 견내량을 빠져나와 넓은 한산도 앞바다로 가게 됩니다.
조선수군은 학익진 대형을 만들기 위해 점차 사방으로 퍼지면서 도망가는 시늉을 했고, 어느순간 조선함대 전체가 돌연 멈춰서 선체를 선회하기 시작합니다. 조선군 배의 옆면이 일본 함대를 마주보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일본군은 이제 학의 날개 안에 감싸져 있었고, 이순신은 발포 명령을 내립니다.
그렇게 일본 수군의 배에는 구멍이 나게 됩니다. 하지만 와키자카는 맞으면서도 계속 돌격을 명령합니다. 수적으로 우세했으며, 다음 장전까지는 시간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판이었습니다. 판옥선은 일제히 반대로 선회해 배의 반대편 면을 적군에게 들이대고 바로 다시 발포합니다. 장전의 시간없이 곧바로 일본군의 피해가 2배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계속 돌격했고 일본군은 드디어 조총의 사거리 안까지 조선 수군쪽으로 거리를 좁힙니다. 하지만 이때, 조선함대 사이에서 거북선이 나타나 길을 막아섭니다. 거북선 2척이 정확한 타이밍에 투입되어 일본군을 압박합니다. 일본군은 쐐기 대형으로 진격했는데 거북선이 그 길을 막으니 일본군은 더이상 진격이 불가능했습니다.
일본군 함선은 돌격대 거북선 2대에 의해 자기들끼리 부딪히기 시작했으며, 거북선을 제대로 공략하지도 못했습니다. 이렇게 일본군의 모든 전략을 실패했고, 포위 후 섬멸되었습니다. 와키자카는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선수군은 일본함선 59척을 궤멸시킵니다. 특히나 일본군 대장선 36척 중에는 35척을 격파시킵니다. 일본군은 사상자는 9천여 명에 달했고, 겨우 14척의 배만 살아 돌아갔습니다.
3. 한산도 대첩 이후 임진왜란
한산도 대첩으로 일본의 전라도 점령 계획이 실패합니다. 한산도 대첩은 일본군의 기세를 완전히 꺾고 조선군 반격의 발판을 마련한 매우 중요한 전투로 평가됩니다.
한산도 대첩 이후 선조는 이순신을 파직시킵니다. 선조의 질투와 원균의 부채질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이순신이 파직되고 삼도수군통제사는 원균이 맞게 됩니다.
4. 칠천량 해전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를 맡고 조선 수군은 칠천량에서 임진왜란 최악의 패전을 당합니다. 칠천량해전에서 거북선 3척, 판옥선 140여척이 침몰되었으며, 조선 수군 1만 여명이 사망햇습니다.
5. 정유재란과 명량해전
일본은 다시 조선을 침공합니다. 이에 선조는 부랴부랴 다시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시키지만 지원을 해주지는 않았습니다. 원균이 칠천량해전에서 패배한 후 이순신에게 남은 병력은 13척의 판옥선뿐이었습니다.
일본군의 대장은 '구루시마 미치후사'였으며, 이순신은 울돌목에서 일본수군을 막기로 합니다. 조선수군 판옥선 13척은 울돌목으로 향합니다. 징비록에 따르면 일본군 총 함대의 숫자는 300여척이었고, 적장 구루시마의 직할 함대만 따로 떼어도 133척이었다고 합니다.
적들이 다가오자 이순신은 진격 명령을 내리는데 판옥선 13척 중 1척은 도망을 가버리고 11척은 더이상 앞으로 가지 않고 대장선 뒤쪽에 가만히 있었습니다. 결국 이순신이 탄 대장 판옥선 1채로 구루시마의 133척을 맞서야 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먼저 일본의 작지만 빠른 세키부네가 대장선으로 돌격합니다. 세키부네는 갈고리를 대장선에 던져 기어오르기 시작합니다. 대장선은 맹렬히 저항하지만 점차 지쳐갔습니다. 하지만 대장선의 전투가 이어지는 동안에도 다른 판옥선은 도우러 오지 않았습니다.
이순신은 초요기를 올려 계속해서 나머지 판옥선의 지원을 요청합니다. 이에 거제현령 안위와 중군장 김응암의 판옥선이 배가 대장선을 도우러 옵니다. 이렇게 판옥선 3척이 정오까지 버텼고, 정오가 지나가 울돌목의 물살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이전까지는 일본군에서 조선군 쪽으로 물이 흘렀다면 이제부터는 일본 군이 역류를 맞게 된 것입니다.
그동안 전투에서 생겼던 일본군 배의 잔해들이 일본군 쪽으로 흘러가 일본 수군은 엉키게 됩니다. 또한 판옥선은 순류를 타고 함포 사격을 전개합니다. 이에 겁을 먹고 움직이지 않았던 나머지 판옥선들도 합류하기 시작합니다. 1대가 3대가 되었다가 이제 12대의 판옥선이 모두 전투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조선군은 맹렬히 공격했고, 적장 구루시마 미치후사가 전투중 사망하게 됩니다. 일본 전선 31척이 침몰했고, 92척이 난파됐으며, 3천여명의 일본수군이 전사했습니다. 이에 반해 조선수군은 11명이 전사하고 21명이 부상을 당하는 데 그쳤습니다.
6. 명량해전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량해전의 패배 이후 조선정복의 계획을 수정합니다. 군사를 남해 연안에 있는 성에 주둔시키면서 천천히 정벌하기로 합니다. 그동안 이순신은 군량미와 병력을 확보하고 판옥선을 생산하며 전쟁을 대비합니다. 이때 생산된 판옥선으로 노량해전에서 일본군을 이길 수 있게 됩니다.
7. 노량해전
명량해전 후 1598년 8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일으킨 장본인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합니다. 이에 모든 조선에 있는 일본군이 후퇴하게 됩니다. 당시 일본군은 울산왜성, 사천왜성, 순천왜성 3곳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이 중 울산왜성, 사천왜성에 있던 일본군들은 빠르게 후퇴하지만 순천왜성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이 순천왜성을 포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순천왜성을 지키고 있던 일본군 장수는 고니시 유키나가였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아꼈던 일본장수로, 한양을 함략시킨 임진왜란의 선봉장이기도 했던 장수입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조명 연합군의 포위를 뚫고 일본으로 돌아가기 위해 명나라 장군 진린에게 뇌물을 바칩니다. 그리고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참고로, 시마즈 요시히로는 칠천량해전에서 원균의 군대를 궤멸시킨 장본인입니다.
당시 조명 연합군은 조선 판옥선 80척, 협선 120척에 명나라 수군 300척이었습니다. 서쪽의 고니시 함대 300척과 동쪽의 시마즈 함대 500척이 동시에 온다는 말을 들은 이순신은 선제공격하기로 마음 먹습니다.
이순신의 조선수군과 진린을 대장으로 하는 명나라 수군은 노량해협에서 시마즈 함대를 기다립니다. 일본함대가 노량해협을 건너자 이순신의 함대가 기습공격을 감행합니다. 그러게 조명 연합군과 일본군이 맞붙는 와중에 명나라 수군의 장수 등자룡이 전사하고 등자룡이 탄 판옥선이 침몰하게 됩니다.
하지만 계속 조명 연합군이 일본군을 밀어부치자 일본군은 퇴각한다. 퇴각 중에 일본군은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마는데, 퇴로를 두고 길을 잘못들어 관음포라는 막다른 곳으로 배를 움직입니다. 궁지에 몰린 시마즈 군과 조명연합군은 새벽이 될때까지 최후의 결전을 벌입니다. 반면, 시마즈에게 지원군을 요청했던 고니시는 시마즈를 돕지 않고 도망을 가버립니다.
일본의 조총부대는 조선군의 대장 이순신을 노려 사격을 계속했고, 이순신은 가슴 혹은 겨드랑이 부근에 총알을 맞고 쓰러집니다. 그러자 아들 이회가 이순신에게 달려가고 이순신은 전투가 급하니 자신의 죽음을 알라지 말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깁니다. 이를 받든 조선군은 동요하지 않고 끝까지 일본수군을 공격합니다.
전투 결과는 조선의 대승이었습니다. 일본군의 함대 500척 중 도망에 성공한 함선은 50여 척에 불과했습니다. 반면 조선군의 판옥선은 단 4척이 침몰했으며, 명나라 전함은 29척이 격침되었습니다. 이렇게 임진왜란은 노량해전과 함께 종결되었습니다.
참고로 살아남은 시마즈와 도망친 고니시는 모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편에 서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맞섭니다. 하지만 히데요리 파가 패배하면서 고니시는 참수를 당합니다.(시마즈는 끝까지 항전해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한산-명량-노량을 중심으로 임진왜란의 역사를 전반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재미있게 보셨기를 바랍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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