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부터 대한민국 정치권에는 소위 운동권 출신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운동권 인사들이 보수로 전향하는 건 드문 일이 아니었고, 때로는 진보 진영과 노동계에서 변절자라는 비판을 듣기도 합니다. 특히 현재는 태극기 부대로 불리던 김문수 장관은 과거 진보 진영의 상징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청년 김문수는 노동자 전태일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고, 노동자의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 등 비인간적인 노동환경에 큰 관심을 갖습니다. 1970년대 서울대생 김문수는 대학생 신분을 숨긴 채 공장에 위장 취업을 하며 파업을 주도하는 등 노동 운동에 온몸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군부 독재 시절로 김문수는 노동 운동과 민주 항쟁 과정에서 두 차례 구속되었고, 학교에서는 두 차례 제적당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김문수의 파란만장한 노동 투쟁은 입소문으로 퍼지면서 수많은 후배들로부터 흠모와 존경을 받았습니다. 당시 김문수의 연설 내용을 그대로 적은 필보들이 돌아다니곤 했는데, 그의 연설문을 돌려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수많은 대학생들은 그를 따라 위장 취업을 통해 노동 운동에 뛰어들기도 했죠.
그리고 그와 함께했던 정치인들의 말을 들어보면 이는 과장된 게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심상정 의원은 당시에 김문수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동지로 지내던 시절에 김문수는 전설이었다, 운동권의 황태자이자 하늘 같은 선배였다." 노래 찬전해 김문수 이렇게 기억합니다. 교도관들이 말하기를, 수만 명이 교도소를 다녀갔지만 김문수는 전투적이고 못 말리는 정치범은 처음 봤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실제 노동 운동권에서 활동했던 시절, 김문수의 지략과 근면 성실성 그리고 전투성은 참 대단했어요.
그러나 김문수는 보수 여당의 국회의원으로 대변신을 했고, 현재는 그 기유의 아이콘이 되는 등 과거와는 180도 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를 지켜본 과거 동지들은 김문수에 대해 노동 운동을 배신한 변절자라고 부르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심상정 의원은 김문수에 대해 이렇게 말하기도 했죠. "잊혀진 계절이다." 과거 학생 운동의 황태자였던 김문수와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을 반대하는 김문수는 연결할 수 없다. 1980년대 김문수의 동지였던 유시민 작가는 김문수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의 김문수와 과거의 김문수를 비교하는 것은 굉장히 부당하다." 노동 운동권의 상징이었던 김문수가 어쩌다가 극우로 전향한 것일까? 오늘은 노동계의 전설이었던 그 시절 김문수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

김문수의 어린시절
김문수는 1951년 경북 영천의 경주 김씨 집성촌에서 태어납니다. 이곳은 유교 전통이 강한 동네로, 김문수는 초등학교 내내 서당을 다니며 사서삼경 등을 배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경주 김씨 문중의 종손으로서 문중의 대소사를 책임지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가족보다 문중의 관홍 상제를 챙기는 게 우선이었고, 결국 집안 어른의 보증을 잘못 섰다가 가족들은 영천 읍내의 판잣집으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김문수는 아버지를 이렇게 기억합니다. 봉건주의의 마지막 책임자였던 분이었다. 그리고 김문수는 영천군에서 공부를 잘하기로 유명했는데, 집이 가난하여 중학교 진학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김문수의 가능성을 알아보신 담임 선생님의 도움으로 경북 중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경북 고등학교에 입학했는데, 김문수는 도산 창호의 유지를 받들어 만든 수양 동우회에서 활동합니다.
이곳에서 사회 의식을 키웠던 김문수는 고등학교 3학년 때 박정희의 삼선 개헌 반대를 주도합니다. 당시 대한민국은 4년 중임제 대통령제로, 박정희 대통령은 1967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었지만, 이것이 박정희 대통령의 마지막 인기였습니다. 그러나 1969년 민주공화당은 박정희 대통령의 삼선을 가능하게 하는 목적으로 개헌을 주도했는데, 이것이 바로 삼선 개헌 이후 삼선 개헌으로 합법적으로 삼선까지 할 수 있게 된 박정희는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다시 출마하였습니다. 그리고 김문수는 이 삼선 개헌을 반대하다 경찰 조사를 받게 되었는데, 이곳에서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무기정학 처분을 받게 됩니다.
서울대 입학 이후
다행히 대학 입시를 몇 개월 남겨놓고 정식으로 풀리면서 김문수는 시험을 볼 수 있었고, 1970년 서울대 경영학과에 합격합니다. 그렇게 대학생활이 시작되었지만, 김문수는 대학 생활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고등학교 때도 월간지 사상계를 읽고 토론을 즐겼던 그에게 첫 중간고사 시험은 실망 그 자체였다고 합니다. 고등학교 때보다 더 형편없는 시험이었고, 단답형으로 괄호 안을 채우는 것이었는데, "내가 이거 하려고 대학에 들어왔나?" 싶더군요.
그러던 어느 날, 강의실에 앉아 수업을 기다리던 새내기 김문수 앞에 한 선배가 나타나 연설을 시작합니다. 그는 이후 국회의원을 지내게 되는 심재권이었죠. "여러분은 출세하려고 대학에 들어왔느냐? 이 나라의 현실이 보이지 않습니까? 정말 힘들고 어려운 사람을 우리가 반드시 도와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려운 사람을 돕는다는 사명감으로 하늘의 별처럼 높은 이상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이를 들은 김문수의 심장은 뛰었고, 결국 본격적인 학생 운동에 발을 들여놓게 됩니다.

운동권으로 변신
김문수는 행동하는 운동권으로 변신했고, 연반대 시위를 시작으로 각종 시위 대열에 적극 가담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던 1970년 11월, 평화시장 봉제공장 재단사 전태일의 죽음은 당시 서울대 1학년에 재학 중이던 김문수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김문수는 큰 충격을 받고 공장 노동자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었죠. 훗날 김문수는 전태일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전태일은 노동자를 위한 예수다. 자기를 위해 죽은 게 아니다. 불쌍한 여공들이 다락방에서 피를 토하고 죽는데, 왜 아무도 돌보지 않느냐? 근로기준법은 왜 두고, 노동부는 뭐 하고 있느냐? 이걸 계속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71년 여름, 김문수는 처음으로 노동 현장에도 뛰어들게 되었는데, 이는 대학생 신분을 속인 첫 번째 위장 취업이었습니다. 사실 당시에는 농어(노동자 위장 취업)는 보편화되어 있었어도, 공장 활동이라는 개념 자체가 생소했습니다. 그리고 그를 구로공단 미싱 공장에 취직시킨 사람은 바로 김근태 전 의원입니다. 김근태는 서울대 상대 학생 회장 때 부정 선거에 항의하다 제적당하고, 강제 징집됐다가 복학한 상태였죠. 참고로 김근태는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학번으로 경기고등학교 동문이자, 대학 동기인 조영래, 손학규와 더불어 서울대 고학번 3총사로 불리고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김문수는 선배 김근태를 이렇게 기억합니다. "김근태 선배는 당시 데모를 위주로 하는 사람이었어요. 김 선배는 상과대, 소위 대모 잘라는 애들을 내명 뽑아서 공허를 보낸 거지요." 한 달을 했는데, 평생 동안 할 수는 없겠더군요. 이 모습을 지켜본 김 선배는 "너의 계급적 한계"라고 얘기했죠.
그러던 1971년 10월, 박정희 정권은 운동권 대학생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나섰고, 김문수는 결국 학교에서 제적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때 김문수는 좌절하지 않고 노동자로서의 삶을 살기로 결심하면서 본격적인 노동 투쟁이 시작됩니다. 먼저 한자 투성인 근로기준법을 읽고 싶었던 전태일의 뜻에 따라, 노동자들에게 한자와 노동법을 가르쳤고, 똑딱이 단추를 달아주며 노동자들과 함께 지냈습니다. 여기에 노동 운동을 보다 제대로 하기 위해 각종 기술 자격증을 취득하는데 열심히 노력하여, 기능사와 환경 기사 등 7년 동안, 여덟 개의 자격증을 취득했죠.
이런 자격증을 바탕으로 한일 도루코에 입사한 김문수는, 특유의 친화력과 사람들을 휘어잡는 언변으로 앞장서서 노동자들의 투쟁을 직접 이끌게 됩니다. 그리고 1978년, 김문수는 28이라는 젊은 나이에 구로공단의 한일 도루코 노조위원장에 선출되었고, 그가 일하던 한일 도루코 노조는 한국의 대표적인 노조로 명성을 날립니다. 노조를 이끌고 일주일간 파업을 전개하여 임금 30% 인상을 쟁취하며 완벽한 승리를 이끌었고, 김문수는 노동운동가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죠.
결 혼
그러나 1980년, 전두환의 신군부가 집권하면서 상황은 180도 달라지게 됩니다. 훗날 김문수의 아내가 되는 설난영 여사는 전남 고흥에서 태어나 살았고, 이후 순천에서 살았습니다. "난영이 라는 이름은 딸을 극진히 사랑한 부친이 난초처럼 편안한 삶을 살기를 기원하면서 지어준 이름이라고 합니다." 사실 당시만 해도 소녀들 이름은 대부분 끝말에 주로 "자"를 쓰던 시절로, 그녀의 이름은 매우 세련된 것이었죠. 그리고 설난영은 순천에서 여고를 졸업했지만, 대학에 낙방하며 서울로 올라와 재수 생활을 시작합니다. 이후 서울 친척 집에서 재수학원에 다녔지만, 몇 년을 낙방했고, 당시 우연히 만난 친구가 세진 전자를 추천해 줍니다.

그렇게 1978년 서울 구로 공단에 있는 세진 전자에 취직하면서 그녀의 인생은 전환점을 맞게 됩니다. 이곳에서 그녀는 노조 위원장직을 맡게 되었고, 평생 노동운동을 하면서 살아야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리고 노동 운동을 하면서 자연스레 김문수를 만나게 되었는데, 김문수는 설란을 비롯한 노동자들에게 노동법과 각종 이론을 가르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설난영을 눈여겨본 김문수는 그녀와 결혼을 결심하고 청혼을 합니다. 그러나 설씨는 면전에서 거절했는데, 노조 활동을 하면서 결혼 생활을 잘해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전두환의 신군부가 권력을 잡은 1980년, 김문수는 정화 대상자로 지목되어 삼청교육대로 끌려가야 하는 수배자가 됩니다. 갈 곳 없던 김문수가 몸을 숨긴 곳은 설난영의 자취방이었고, 둘은 급격히 가까워지며 결혼을 약속합니다. 그러나 결국 김문수는 남영동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게 됩니다. 일주일 동안 잠도 안 재우고 줄기차게 고문이 이어졌는데, 그의 혐의는 반공법 위반이었습니다. 남민전 사건에 서울대 선배들이 관련되면서 김문수도 지사 대상에 올랐던 것인데, 별다른 혐의가 없자 42일간 구속됐다가 풀려나게 됩니다. 그러던 사위 형사들은 회사로 찾아가 김문수가 좌익 적색 분자라는 소문을 퍼뜨렸고, 노조원들도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김문수가 무죄 판정을 받고 풀려나자 상황은 역전되었습니다. 간첩인데 어떻게 석방되느냐며, 오히려 두터운 신뢰를 보였습니다. 여기에 위장 취업 이후 서울대 출신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미지는 더욱 좋아졌죠. 이후 김문수는 한일도루코 노조 위원장에 복귀했고, 강경 파업을 통해 회사가 부당하게 해고한 노조 간부 50명 전원을 복직시켰습니다.
"우리 딸을 어떻게 먹여 살릴 거냐"는 설난영의 부모님께, 가진 건 없어도 패기 하나는 초고였던 김문수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만인을 위해 살려고 하는데 한 여자를 못 먹이겠습니까." 그렇게 1981년 9월 26일, 김문수와 설난영은 웨딩 드레스도 청첩장도 없는 결혼식을 올리게 됩니다. 경제적 여유도 없었지만, 하객들 대부분은 힘든 노동자들이었고, 검소하게 식을 치른 것이었죠. 여기에 신부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입장하는 게 보통이었지만, 신랑과 신부가 동시에 입장합니다. 이는 평등하고 민주적인 가정을 이루고자 했던 두 사람의 약속이었고, 그러나 신군부가 이 결혼식에 주목하면서 결혼식 풍경은 가히 살벌했다 전해집니다. 이날 결혼식에는 하객보다 경찰이 더 많았으며, 결혼식장 주변으로는 전경 버스 다섯 대가 출동했습니다. 당시 경찰은 이 결혼식이 시위를 열기 위한 위장 결혼식으로 의심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바로 2년 전인 1979년 11월, 명동 YMC 회관에서 제하 세력들이 대통령 간선제 시행을 저지하기 위해 결혼식을 가장해 집회를 개최하다 적발된 적도 있었죠. 그리고 결혼식을 올린 김문수는 서울대 앞에 서점을 열어 생계를 간신히 유지하게 됩니다. 그러나 김문수는 여전히 노동자복지협의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며 노동 현장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습니다.
심상정, 유시민과의 인연
심상정은 서울대 재학 중 김문수의 뒤를 이어 미싱사 자격증을 따고, 구로공단에 위장 취업하며 김문수와 같은 길을 걷고 있던 동지였습니다. 훗날 심상정 의원은 운동권에 들어간 계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낭만과 지성이 넘치는 대학 생활을 꿈꿨다. 사실 운동권은 관심이 없었는데, 마음에 드는 남자 친구를 찍어 뒤를 쫓아 보니 영락없이 운동권이었다. 그렇게 들어갔다가 제가 더 센 운동권이 됐다."
그러던 1985년, 심상정은 구로 동맹 파업을 펼치면서 김문수와 인연을 맺게 됩니다. 구로 동맹 파업은 당시 노동자들이 밀집한 구로 공단에서 노동자들의 열악한 근로 현실을 알리고, 군부 독재 정권의 노조 탄압에 맞서기 위해 여러 기업의 노조가 연대했던 최초의 대규모 투쟁이었고, 이후 김문수와 심상정은 서울 노동 운동 연합 결성을 주도하는 등 둘은 서로 신뢰하고 매우 가까운 동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김문수는 "내가 가장 신뢰하는 남녀 후배가 결혼하면 어떻겠느냐"는 자신의 후배였던 이승배 씨를 심상정에게 소개해 부부의 연까지 맺어줍니다. 그리고 이들이 결성한 선우회는 개별 기업의 노조 결성과 투쟁을 지원하고, 선호연 신문 발간을 통해 전두환 정권의 포괄 정치를 폭로하는 등 본격적인 정치 투쟁을 벌였었지요.
그러던 1986년, 인천 53 민주항쟁이 일어나자 전두환 정권은 선호연 지도부 검거에 나섭니다. 결국 김문수는 보안사에 연행되었고, 모진 고문을 당하게 됩니다. 이때 김문수는 생사를 오가는 전기 고문과 물고문을 당하면서도 심상정의 행방을 털어놓지 않았다는 것은 꽤 알려진 일화입니다. 여담으로 시간이 흐른 2017년, 썰전에 출연한 심상정과 유시민의 말에 따르면, 당시 김문수는 말하지 않은 게 아니라 정말 몰라서 말을 못한 거라고 합니다. 애초 당시 상황 자체가 아지트가 털리는 것을 먼 발치에서 눈치챈 심상정이 도망친 상황이었던지라, 당연히 김문수는 심상정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고 합니다. 유시민은 이렇게 말했었죠. "그때 핸드폰이 있어, 삐삐가 있어 모를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때 김문수와 함께 체포되어 심상정이 있는 곳을 대라고 하며 고문을 당한 여성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바로 유시주입니다. 유시민의 친동생이었기 때문에, 그의 동생 유시주는 이제 선호에 가입하여 핵심 인물로 활동하고 있었죠.
이후 유시민은 김문수의 아내 설난영과 함께 보안사의 항해를 방문하면서 두 가족은 친분을 쌓게 됩니다. 실제 김문수의 서울 관악구 봉천동 집과 유시민의 관악구 신림동 집이 가까워 자주 왕래하며 친하게 지냈다고 합니다. 이런 인연으로 유시민이 노무현 정부의 보건복지부 장관 시절, 경기도를 방문했을 때 김문수를 만나 이렇게 말하기도 했죠. "김문수 선배가 고초를 겪던 시절, 그를 구하러 다니느라 했었는데, 그러길 참 잘했다." 이처럼 서울대 선후배 관계인 김문수와 유시민, 그리고 심상정 모두 선호연 출신으로, 셋은 매우 끈끈한 동지였고 서로 신뢰하던 사이였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동지들은 90년대 들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김문수의 방향 전환
노동 운동가로서 혁명을 꿈꾸며 군부 독재 반대 투쟁을 주도했던 김문수는 1991년 소련이 무너지면서 신념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소련이 붕괴하자 기존 사회주의 운동 노선에 회의감이 밀려왔고, 김문수는 당시를 이렇게 기억합니다. "그 전까지는 소련에서 나온 영상 자료를 보면 여자들이 좋은 코트도 있고 해서 소련이 잘 사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김문수는 소련 붕괴에도 혁명의 미련이 남아 있었고, 이재오와 손을 잡고 노동운동 세력을 규합해 민중당을 창당하게 됩니다. 이는 자신의 젊음을 바쳤던 노동 운동을 제도권 내에서 이어가기 위해서였죠. 그러나 1992년 제 14대 총선에서 민중당은 단 한 명도 당선되지 못하며 해산되고 말았습니다. 같은 해 열린 제 14대 대선에서도 민중 후보로 추대된 무소속 백기완 후보가 득표율 1%로 그치면서 참패했습니다. 두 번의 선거를 통해 김문수는 큰 상처를 입었고, 그의 생각은 큰 변화를 겪게 됩니다. 김문수와 민중당을 창당했던 이재오 전 의원은 당시를 이렇게 기억합니다. "내가 그토록 민중을 위해 정치한다고 했지만, 민중들은 나에게 표를 안 찍어 주고 우리를 외면했다."
민주자유당 입당
그러던 1994년, 김문수는 44세의 나이에 인생을 180도 바꾸게 될 제안을 받게 됩니다. 김영삼 대통령이 집권 여당인 민주자유당 입당을 권유한 것이었죠. 김문수의 말에 따르면,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 개혁을 나름 높게 평가했다고 합니다. 이는 과거 군부 세력과 비교해 볼 때, 실제로 금융 실명제 등 강력한 개혁으로 사회를 변화시키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YS 권력을 쥐니까 잘하더라고요. 그때 권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죠. 밖에서 혁명을 계속 꿈꾼다고 나라가 발전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결국 입당하면서 혁명을 포기했다고 봐야죠. 그렇게 김문수는 민주자유당에 입당했고, 그가 입당한 뒤에는 이재오와 이우재 등 민중당 동지들도 뒤를 따랐습니다.


이때 김문수는 심상정에게 정치를 함께하자고 제안합니다. 사회주의도 무너진 이제 사회를 조금이라도 바꾸려면 정치를 해야 한다. 그러자 심상정은 이렇게 말하며 거절합니다. "동구권 사회주의가 망하는 거랑 대한민국 노동자의 삶을 인간답게 하는 것이 무슨 상관이냐?" 김문수의 민자당 입당은 진보 진영에 큰 충격을 주었는데, 그가 입당한 민주자유당은 박정희의 민주공화당과 전두환의 민주정의당의 계보 있는 곳이었죠. 즉, 과거 동지들과 김문수가 맞서 싸웠던 독재 정당의 후신이 바로 민주자유당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김문수는 비판을 피할 수는 없었고, 아직까지도 진보 쪽 인사들에게 노동운동을 배신한 변절자라고 불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다만 민주자유당은 3당 합당 이후 김영삼에 의해 독재 정권 인물들이 죄다 쫓겨 나가면서 물갈이 된 당이나 다름 없었다는 반론도 있습니다. 실제 김영삼 대통령이 전두환과 노태우의 당과 합당한 후, 그쪽 인물들을 숙청하고 민주와 동지들로부터 김문수 또한 민자당 입당을 후회한 적이 없다고 여러 번 강조했습니다.
1990년대 공산주의 국가들의 몰락을 지켜보며, 당장의 급진적 사회주의보다 성장의 자원을 집중하되 복지도 함께 따라가야 한다는 온건 노선으로 선회했다. 진보정당 실패에 이어, 당시 사회주의 국가들이 몰락한 상황에서 YS 개혁 드라이브에서 자유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찾았습니다. 이후 김문수는 세 차례 연속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경기도 지사를 지내는 동안 서서히 보수의 아이콘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합니다.
보수의 아이콘으로
김문수는 신한국당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그의 사상은 갈수록 극으로 치달았습니다. 먼저 박정희 대통령의 추모제가 열리자, 김문수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당신을 향해 침을 뱉던 제가 이제는 당신의 무덤에 꽃을 바친다. 저는 고등학교 3학년 때 당신의 삼선 개헌 반대 시위로 무기 정학을 받았으며, 교련 반대와 유신 반대로 대학을 두 번 쫓겨났다. 경부고속도로가 히틀러의 아우토반 럼, 독재 강화 수단이라는 선배들의 가르침대로 반대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우리나라가 세계 5대 자동차 생산국이 되었습니다. 제철과 자동차 그리고 중화학 등, 당신은 최고의 산업 혁명가였던 운동에도 앞장서며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이 나라 근현대사의 중심에 계시고, 우리 역사에 걸출한 지도자이며, 당신의 동상 하나 세우지 못했으며, 기념관조 우리의 무지와 비겁함을 저부터 깊이 반성한다. 광화문에 세워야 할 동상은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이다."
그러던 2010년 경기도지사 선거에서는 재선을 노리는 한나라당 김문수 후보, 그리고 국민참여당 유시민 후보와 진보신당 심상정 후보가 출마합니다. 여당과 야당, 보수와 진보 진영으로 나뉘어 경쟁자 신분이 된 이들은 서울대 선후배 사이이자, 한때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을 함께한 경기도지사 후보 출마 선언을 하면서 김문수 지사를 향해 이렇게 말하기도 했죠, 경기도민의 도지사가 아니라 민생을 외면한 정치 도지사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대통령을 변화하는 정치 도지사로, 경기도의 비와 마찬가지다. 이 선거에서는 김문수가 승리하면서, 김문수는 박근혜 의원 등과 함께 여당의 대선 후보로 떠오르기도 했죠.

그리고 시간이 흘러, 박근혜 정권의 국정농단 사태로 대통령이 탄핵되자, 김문수는 또 한 번의 정치적 전향을 택했습니다. 그 그룹이 불리는 태극기 부대와 함께 움직이며, 마이크를 잡고 박근혜 탄핵 반대를 외쳤습니다. 과거 박근혜 대통령을 향해 독재자의 딸이라며 비판을 거듭했지만, 탄핵 후에는 박 대통령은 억울하다며 적극 변호에 나선 것이었죠. 이후 문재인 정부 시절에는 태극기 세력이 보수의 중심이 돼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전광훈 목사와 손을 잡기도 했죠. 이처럼 보수 기준으로도 오른쪽으로 치우친 그의 행보에 대해 운동권 출신이 더 한다는 뒷소리가 따랐습니다.

좌에서 우로 전향한 이유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김문수가 진보진영과 좁힐 수 없을 만큼 멀어진 이유에 대해 이렇게 추측하기도 합니다. 보수정당에서 대선 후보가 되기 위해선 강성 보수의 지지가 필요하기 때문에, 강한 보수 색채를 뿜어내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리고 2024년, 윤석열 대통령은 김문수 위원장을 고용노동부 장관으로 지명합니다. 대통령 비서실장은 해당 인사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노동현장, 입법부, 행정부 등을 두루 경험한 김 후보야말로 다양한 구성원 간 대화와 타협을 바탕으로 노동개혁 과제를 완수할 수 있는 적임자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야당과 노동계는 천인공로할 인사라고 강하게 반발하고 나서기도 했죠. 김문수 장관은 노동운동가로 출발해, 보수정당의 삼선 국회의원과 재선 경기지사, 태극기 부대까지, 그야말로 끊임없는 의향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좌와 우를 넘나든 그의 행보는 보수 쪽엔 전향과 변신이, 진보 쪽엔 배신과 변절이 불리고 있습니다.
정치학자들은 극좌와 극우는 이념적으로는 정반대의 위치에 있지만, 기본적인 정서는 유사하다고 말합니다. 양자는 적대, 타도, 절멸의 정치 정서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정치 세계에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극좌와 극우는 서로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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